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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의 역사(1) - 뉴욕 자이언츠 본문
제가 수년 째 응원해오고 있는 야구팀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현재를 알기 전에 구단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는지도 알아야겠죠?
창단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샤넬과 카프카, 그리고 무솔리니가 태어났고, 태극기가 고종 황제에 의해 정식 국기로 선포된 1883년에 뉴욕 고담즈(New York Gothams)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담즈라는 이름은 팬들이 붙인 이름이었는데, Gotham이라는 단어에는 '시민'이라는 뜻도 있지만 '바보', '얼간이'등의 의미도 담겨있어 1885년에 뉴욕 자이언츠로 개명했습니다.
뉴욕 자이언츠
개명 후 1957년에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이전하기 전까지 뉴욕 자이언츠라는 이름을 75년간 사용했는데, 이 기간동안 수많은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 뉴욕 자이언츠를 거쳐갔다. 그중에는 스크류볼로 당시 메이저리그를 평정한 칼 허벨, 외야에서의 "The Catch"와 야구역사상 유일한 3,000안타 + 500홈런 + 10회 골드글러브에 빛나는 "The Say Hey Kid" 윌리 메이스, 그리고 20세기 초반, 뉴욕 자이언츠를 엄청난 강팀으로 만들었던 전설적인 감독 존 맥그로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뉴욕에 있던 75년간 자이언츠는 23번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해 17번을 우승했고, 월드 시리즈는 8번 진출해 5번을 우승했습니다.
당시 구단 라이벌로는 같은 뉴욕에 위치한 뉴욕 양키스와 브루클린 다저스가 있었습니다. 자이언츠와 이들이 만나면 서브웨이 시리즈라 이름이 붙었는데, 양키스와는 월드시리즈에서 6번이나 만났고, 다저스와는 매 시즌 몇번씩 맞붙었습니다. 이 중 다저스는 1957년 자이언츠가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길 때, 바로 윗 도시인 로스앤젤레스로 같이 옮기며 라이벌리가 계속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구단 역사
뉴욕 자이언츠의 첫 내셔널리그 우승은 현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전신이었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꺾은 1888년이었습니다. 이듬해 한번 더 내셔널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브루클린 다저스를 꺾고 월드 챔피언십 우승까지 차지하였습니다. 이 떄는 아직 현대의 디비전/챔피언십/월드시리즈가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1890년부터 1902년까지 팀의 재정상황과 당시 잠시 생겼다가 사라졌던 플레이어스 리그의 등장에 선수단 이탈이 심해지며 암흑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후 1902년, 1895년에 구단을 매입한 앤드류 프리드먼 구단주는 1932년까지 팀을 이끌게 되는 존 맥그로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부터 영입하게 됩니다. 당시 맥그로는 플레잉코치 직함을 받고 선수로서 경기도 직접 뛰고 감독으로 팀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1902년부터 1932년까지, 프로스포츠 역사상 가장 오래 팀을 이끈 감독 중 하나인 존 맥그로는 재임기간중 9번의 내셔널리그 우승과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내고, 1933년 내셔널리그와 월드시리즈 우승컵은 자신이 직접 고른 후계자 빌 테리와 함께 들었습니다.
빌 테리는 1932년 중반부터 9년 반동안 팀을 이끌었는데, 이 기간동안 세번의 내셔널리그 우승을 했고, 1933년 월드시리즈 우승도 경험했지만, 1936년과 37년, 연속된 두번의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칼 허벨이 미래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타자들인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 알 시몬스, 조 크로닌을 연속으로 삼진으로 돌려세운 1934년이 지나고 1942년, 멜 오트 감독이 빌 테리를 이어 팀을 이끌게 됩니다.
그러나 멜 오트 감독 취임 직후 2차대전이 발발하여 별 기록 없이 임기를 마치게 되었고, 1948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레오 듀로셔 감독이 새로 오게 됩니다.
듀로셔 재임기간은 자이언츠는 팬들의 기억에 가장 남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5툴 슈퍼스타 윌리 메이스가 팀에 오게 되었고, 1951년과 54년 내셔널리그 우승과 함께 자이언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플레이 두개가 나왔고, 더불어 당시 리그 111승 43패를 달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꺾었기 때문입니다.
"Shot Heard 'Round the World"
1951년에는 "Shot Heard 'Round the World"라고 불리우는 바비 톰슨의 자이언츠 내셔널리그 우승행 끝내기 홈런이 있었습니다.
당시 자이언츠는 8월까지 리그 선두이자 라이벌 브루클린 다저스에 13.5게임 뒤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듀로셔 감독이 팀의 16연승을 만들어내며 다저스를 무섭게 추격하여 양팀 모두 96승 58패, 동률을 만들어냈고, 3판2선승제인 타이브레이크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저스 홈 에베츠 필드에서 열린 1차전은 짐 히언이 선발로 나온 자이언츠가 랄프 브랭카가 나온 다저스를 바비 톰슨과 몬테 어빈의 홈런으로 3대1로 자이언츠가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자이언츠 홈 폴로 그라운드에서 열린 2차전은 재키 로빈슨, 질 호지스, 앤디 파프코, 루브 워커의 홈런과 선발투수 클렘 리바인의 완봉을 앞세워 다저스가 자이언츠를 10대 0으로 눌렀습니다.
그리고 1951년 10월 3일, 승자가 월드시리즈로 진출하게 되는 3차전이 폴로 그라운드에서 열렸습니다.
7회까지 1대1로 팽팽했던 경기는, 8회 초 다저스가 피 위 리스와 듀크 스나이더의 안타, 자이언츠 선발 살 매글리의 폭투와 재키 로빈슨 고의사구에 이은 앤디 파프코의 안타, 그리고 빌리 콕스의 안타까지 해서 4대1로 앞서나갔습니다.
8회 말과 9회 초가 지나고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인 9회 말, 다저스 마운드에는 4일 전 완투, 다음날 5 2/3이닝을 던졌던 돈 뉴컴이 올라왔습니다.
유격수 앨빈 다크가 안타를 치고 나갔고, 다저스 1루수 질 호지스의 수비 포지션 미스를 틈타 돈 뮤엘러가 1루수와 선상 사이를 뚫는 안타를 쳤습니다. 몬테 어빈의 파울플라이 아웃 이후 화이티 록맨의 안타로 한점 따라붙어 4대 2가 됩니다.
바비 톰슨이 타석에 들어왔고, 다저스 감독 척 드레센은 돈 뉴컴 대신 1차선 선발이었던 브랭카를 마운드로 올립니다. 초구는 몸쪽 낮은 스트라이크. 2구는 3구째 바깥쪽 낮은 변화구의 위력을 높이기 위한 몸쪽 높은 직구였는데, 톰슨이 이를 받아쳐 좌측 파울 선 근처 관중석에 떨어지는 끝내기 3점 홈런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홈런으로 내셔널리그 우승을 결정짓고 월드시리즈로 진출했지만, 자이언츠는 뉴욕 라이벌 양키스에 시리즈 스코어 4대 2로 패하며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The Catch"
1954년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나온 윌리 메이스의 수비입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자이언츠는 1차전 7회까지 2대 2 동점인 상황이었습니다. 선발투수 살 매글리는 8회 초 선두타자였던 래리 도비를 볼넷으로 내보냈습니다. 후속타자인 알 로젠은 안타를 치고 나갔고, 듀로셔 감독은 곧바로 좌완투수 돈 리들을 클리블랜드의 좌타자 빅 베르츠를 상대하기 위해 내보냈습니다.
2볼 1스트라이크까지 골라낸 베르츠는 리들의 4구를 쳐내 센터필드 깊숙히 날아가는 타구를 날렸습니다. 420피트(130미터) 이상을 날아간 공은 다른 구장이었다면 넉넉하게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이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경기가 열렸던 구장은 자이언츠의 홈인 폴로 그라운드 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포스팅할 이야기이지만, 야구가 아닌 폴로 경기를 목적으로 지어진 폴로 그라운드는 외야의 모양이나 그 크기가 타 구장에 비해 정말 비정상적으로 크고 이상했고(좌/우측 펜스는 102미터였지만, 중간 펜스는 무려 147미터였다), 자이언츠 중견수는 아직도 역대 최고의 중견수로 평가받던 윌리 메이스였습니다. 살짝 앞에서 수비하던 메이스는 공을 쫓아 끝까지 뛰어갔고, 그 넓은 외야의 워닝트랙까지 따라가서 공을 기어이 잡아냈습니다.
이 수비로 인해 5대 2로 앞서갈 수 있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무사 1, 2루 상황이 1사 1, 3루로 바뀌는 데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이언츠는 10회 끝내기를 치며 경기를 가져왔고, 그대로 월드시리즈도 4연승으로 스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당 장면은 야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로 회자되는데, 공을 따라가서 잡아내는 플레이의 어려움과 장면이 벌어졌던 경기의 중요성이 그 이유로 꼽힙니다.
샌프란시스코로의 연고지 이전
1954년 월드시리즈 이후 3년간 자이언츠는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월드시리즈 우승 이듬해인 1955년, 자이언츠는 3위에 그치고 말았고, 관중 수 또한 계속해서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윌리 메이스의 호수비가 나왔던 폴로 그라운드 역시 구단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해 왔습니다. 40년대부터 유지가 잘 되지 않아왔고, 구장 개선 또한 자이언츠가 소유한 부지가 없어 불가능했습니다.
폴로 그라운드를 대체할 새 구장을 찾던 자이언츠는 뉴욕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첫 번째로, 미네소타에 위치해있는 자이언츠의 최상급 유망주 팜이었던 미네아폴리스 밀러스의 메트로폴리탄 스타디움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규칙에 의해 밀러스의 구단주였던 자이언츠는 해당 지역의 메이저리그 구단이 될 우선권을 갖고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접촉으로 인해 미네소타로의 이전은 무산되었습니다. 해당 구단은 이후 1961년 미네소타 트윈스가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주지사 조지 크리스토퍼가 자이언츠와 접촉했고, 주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주주 호레이스 스톤햄이 샌프란시스코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다저스 구단주 월터 오말리 또한 로스앤젤레스로의 연고지 이전 협상을 하고 있었는데, 로스앤젤레스 측에서 오말리에 캘리포니아에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이 없으면 이전이 안된다는 말을 들었고, 그러한 연유로 오말리가 스톤햄에게 연고지 이전을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957년 여름, 뉴욕 자이언츠와 브루클린 다저스가 캘리포니아로의 연고지 이전을 발표하며 자이언츠-다저스-양키스의 황금기가 끝이 났습니다.
빈자리와 뉴욕 메츠
뉴욕은 1962년까지 뉴욕 양키스 홀로 연고지로 삼는 도시로 남아있었지만, 자이언츠의 두 번째 대주주였든 조안 휘트니 페이슨이 뉴욕 메츠를 창단하고 내셔널리그를 다시 뉴욕으로 가져오면서 메이저리그에 연고지 이전 및 확장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이 창단된 뉴욕 메츠는 자이언츠 모자의 NY 로고와 유니폼의 오렌지색 테두리, 그리고 다저스의 파란색 바탕색을 인용해 뉴욕에서 활동했던 두 내셔널리그 팀을 기리는 유니폼과 로고를 만들었습니다.
다음은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긴 자이언츠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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